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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덕동 성당 주중직심도의 신석복 순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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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의 유해가 모셔진 제대
1866년 음력 1월 병인박해가 시작 되자마자 대구 영포의 우두머리와 포졸들이 신석복 마르코를 잡으러 명례로 왔다. 때마침 신석복은 창원 마포에 장사하러 간 상황이라 포졸들은 여러 날을 수소문 하며 기다려야했다. 체포 당시 신석복은 명례로 가는 배를 타기 위해 세 명의 짐꾼과 함께 가산나루터로 들어왔는데 대구 포졸들이 한 사람씩 심문하였고, 신석복의 짐 보따리 안에서 기도서와 성물이 나와 체포하게 되었다. 이때가 음력 2월 1일이었다. 신석복을 체포한 포졸들은 밀양에 하루 머물면서 신석복의 몸값으로 80냥을 요구하였고, 그의 형제들이 돈을 구해 찾아갔으나 그때 신석복은 형에게 “나를 위하여 한 푼도 포졸들에게 주지 마라.”는 단호한 말을 하였다. 할 수 없이 형은 돈을 가지고 울며 돌아갔고, 신석복은 포졸들을 재촉하여 대구로 갔는데 가는 도중에 무수한 형벌을 받았다고 전해진다. 이처럼 신석복은 전교활동을 하면서 체포되면 순교까지 할 각오로 신앙생활을 했던 것이다. 대구로 압송된 신석복 마르코를 위해 가족들은 영장에게 사면의 글을 올리고 재심을 청하여 영장이 다시 신석복에게 묻기를 “너는 천주학을 하느냐?” “합니다.”, “너를 놓아주어도 하겠느냐?” “나가도 하겠습니다.” 라고 대답하였다. 그 후로 무수한 형벌을 받고 육혈에 옷이 다 젖고 뼈가 부러져도 배교하지 않아 십여 일 만에 순교하였다. <치명일기>와 <병인치명사적> 18권에서는 복자의 순교를 “교(絞)하여 치명하니”라고 적고 있다. 이는 조선시대에 중죄인을 사람들 앞에서 목을 매어 처형하던 교수형의 일종이다. 그렇게 신석복 마르코는 1866년 3월 31일 (음 2월 15일) 대구에서 39세에 순교하였다.
김구정의 「영남의 순교사」에서 “신말구 미망인의 증언에 의하면, 아들 이냐시오가 돈을 가지고 대구로 가서 그 부친의 시신을 찾아 명례리 본고장으로 운반해 오는데, 당시 마을사람들이 그를 반대하여 부득이 장방리 노루목에 안장하였다.”라고 전한다. 당시 노루목에는 순교자와 나이가 같은 서응권 요한의 가족이 살고 있었고 노루목과 가까운 곳인 시례리에는 박대식 빅토리노 가족도 살고 있었다. 노루목에 모셔진지 110여 년이 지난 1975년 12월 1일 순교자의 유해를 진영 천주교공원묘지로 이장하였고, 2018년 12월 8일 순교자의 유해를 다시 명례성지 부활경당 제대로 이장하면서 순교하신지 150여 년 만에 생가 터인 명례성지로 유해를 모셔올 수 있었다.
신석복 마르코의 장남 신영순 이냐시오는 천주교를 적대하던 사회풍토 때문인지 아버지의 순교 때문인지 1888년 38세의 늦은 나이에 결혼을 했고, 1930년 80세로 선종하기까지 다복하게 살았다. 그는 부친의 순교를 <병인치명사적>과 <박순집 증언록>에 직접 증언도 하였다. 슬하에 아들만 4명이 있었는데 그중에 막내가 1935년 대구교구에서 사제 서품을 받은 신순균 바오로 신부이다. 신순균 바오로 신부는 고성 황리성당 초대 사제로 2년간 사목을 하였고, 그 뒤 계산성당 보좌, 안동성당, 청학동성당, 삼덕성당 주임으로 사목활동을 하다가 1948년 38세로 선종하였다. 순교자의 아들과 손자가 신앙생활을 열심히 했다는 것은 신석복 순교자가 혼자서만 열심히 신앙생활을 한 것이 아니라 가족들에게도 신앙을 잘 전해주어 공동체 신앙을 바탕으로 선교를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